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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해중 ICT과학부 부장 ⓒ News1
(서울=뉴스1) 임해중 ICT과학부 부장 = 수재라는 말이 어울리던 과학도는 비선형적 기후 시스템과 생태계 반응을 정량화하면 지구적 위기에 대응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지구온난화의 수학적 예측 가능성을 증명한 2021년 노벨 물리학상 연구와 방향이 닮았다.

이른 나이에 박사과정을 마친 과학도는 수학과 기후 지표생물에 조예가 깊었다. 특히 조류 생태학과 기후변화 추이를 엮어 정량화하려 했는데 주된 연구대상은 도요새였다.

그래서 과학도는 도요새 주요 경유지인 남해안 갯벌을 지켰다. 새끼를 치려고 북으로 이동할 때 도요새 무리는 갯벌을 거쳤다. 번식기를 맞은 수컷들이 낮에는 갯벌 안에서 먹이를 놓고 다퉜고 밤이면 춤을 추며 암컷을 유혹했다. 이 때문에 과학도에겐 밤낮의 구분이 무의미했고 하루 종일 도요새를 파헤치며 기후변화와 생태계 반응 연관성의 수학적 증명을 시도했다.

10년의 연구기간은 짧았으나 생활고는 길었다. 매해 봄, 남해안 고향 갯벌에서 만나던 과학도 얼굴에는 고됨이 쌓였다. 생태계 미세 변화가 기후 시스템의 주요 전이점을 가리킨다며 열변을 토하던 목소리는 잦아들었다. 번뜩이던 천재성도 무뎌진 듯 보였다.

연구를 위해 잘나가던 모교에서 벗어나 지방 계약직 교수를 떠돌던 과학도는 3년전 모든 걸 포기했다. 연구를 위해 정교수 자리가 필요했으나 돈이 안 되는 성과로는 지원 자체가 어려웠다. 모교 출신 연구자들 견제와 파벌에 영향을 받는 관행도 포기를 부추겼다.

무엇보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의대와 전문직 길을 선택하지 않은 결정이 바보 취급당하는 게 견디기 어려웠다고 했다. 애꿎게도 일본계 과학자가 닮은 방향의 연구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던 해, 친구이자 과학도였던 그는 그동안 노력을 뒤로하고 공부방을 개원했다.

3년이 지난 추석연휴, 공부방 원장님이 된 과학도와 만났다. 늦은 저녁을 함께 먹는 도중 노벨 생리의학상 발표가 났다. 우연의 일치인지 3년전 노벨 물리학상에는 일본계 미국인이 올해 생리의학상 발표에는 일본 교수가 선정됐다.

친구를 위로한답시고 일본처럼 지원했으면 기후와 생태계 반응의 연관성 증명도 분명 상 하나는 받을 수 있었을 거라고 말하자 틀렸다는 답이 돌아왔다.

이유를 묻자 일본 정부의 노벨상 전략(50년 안에 노벨상 30명 배출)은 기초과학 발전의 뒷북 결과일 뿐 원인이 아니라고 했다. 일본은 2000년대 이후 노벨상 수상자가 급증했지만 대부분 1980년대 돈이 안 되던 기초연구에 기반 한 성과다. 현지에서는 오히려 노벨상 영광에 취해 신규 세대 연구자 육성에 실패하고 있다는 반성이 나온다고 부연했다.

맞는 말이었다. 노벨상 시즌마다 반복되는 일본과의 비교와 이를 따라하자는 의견의 허점을 그때 실감했다.

과학은 단기 집중훈련으로 메달을 따내는 스포츠 경기처럼 폐쇄적인 환경에서 성과를 내기 어렵다. 개방적 협력 생태계에서 연구 결과를 끈임 없이 반박하며 검증하는 시간이 누적돼야 무르익는 게 기초과학이다. 이를 위해 기초·창의 연구 생태계를 강화하고 정부 지정 방식이 아닌 연구자 주도형 제안의 프로젝트에 힘을 실어주며 기반을 다지는 게 중요하다.

오랜 과학 강국인 스웨덴과 독일이 장기 기초연구와 자유로운 학문을 보장하는 막스플랑크 연구소(MPI) 모델을 유지하는 배경이다. 주류에 반하는 길을 독려하고 노벨상은 부수적 결과 정도로만 여긴다.

이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본질에 비껴간 얘기를 했으니 틀렸다는 답이 돌아오는 건 당연했다.

저녁을 마치고 그에게 우리 기초과학이 성과를 내려면 어떻게 하는 게 좋은지를 물었다. 질문의 의도를 고민하던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이럴 거면 노벨 과학상은 잊어버리는 게 낫다". 누구보다 열정적이고 영민했던 이름 없는 과학도가 남긴 우문현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