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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가 수출 막자 자국산 사용 지시
전문가 “미중 패권 경쟁 격해질 것”

지난 10월 20일, 중국 동부 장쑤성 수전시에 위치한 반도체 제조 공장에서 한 기술자가 장비를 조작하고 있다./AFP 연합뉴스
미국이 앞으로도 엔비디아의 최신 인공지능(AI) 칩은 중국에 공급하지 않겠다고 밝힌 가운데 중국이 자국 AI 데이터센터에 미국 AI 칩 사용을 금지하는 조치를 내렸다. 엔비디아의 GPU(그래픽처리장치)에 의존해온 중국이 사실상 탈(脫)미국을 선언하며 AI 패권 경쟁에 불을 붙이는 신호라는 분석이 나온다.

로이터는 5일(현지 시각) 중국 정부가 국가 자금이 투입된 신규 AI 데이터센터에 자국산 AI 칩만 사용하도록 의무화하는 지침을 발표했다고 보도했다. 착공 이후 완공률이 30% 이하인 데이터센터의 경우는 미국산 AI 칩을 중국산으로 교체하라는 지침을 내렸다고 전했다. 중국 데이터센터에서 미국 AI 칩을 사실상 퇴출하겠다는 것이다.

AI 칩은 GPU와, 이를 고대역폭 메모리(HBM)와 연결한 AI 가속기 등을 말한다. 미국의 엔비디아가 세계 시장의 90% 이상을 점유한다. 미국은 엔비디아가 저사양 AI 칩만 중국에 수출하도록 제한하고 있다. 테크 업계는 이번 중국 당국의 자국 AI 칩 사용 의무화가 엔비디아 AI 칩 없이도 고성능 AI를 개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으로 보고 있다. 일각에서는 미국의 대(對)중국 수출 규제를 완화하려고 맞불을 놓는 협상용 카드라고 지적한다.

한편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는 이날 영국 런던에서 열린 AI 관련 행사에서 “중국이 AI 경쟁에서 미국을 이길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중국의 AI 기술 수준에 대해선 “미국과 불과 ‘찰나의 차이’로 뒤처져 있다”며 거의 따라잡았다고 평가했다.

그래픽=백형선

이번에 중국 규제 당국은 정부 지원금이 들어간 데이터센터에 중국산 AI 칩만을 사용하라는 지침을 냈다. 신설 데이터센터뿐 아니라 공사 진척률 30% 미만 데이터센터도 이미 설치된 모든 외국산 AI 칩을 빼고 중국산으로 대체하도록 했다. 미국 AI 칩 구매 계획이 있는 경우도 취소해야 한다. 기존에는 데이터센터의 중국산 AI 칩 비율을 50% 이상으로 의무화했는데, 이번엔 100% 사용하도록 강화했다. 해외 의존을 벗어나야 한다는 강력한 신호를 AI 업계에 보낸 것이다. 이는 앞으로 자국 힘만으로 AI 데이터센터를 운용하겠다는 계획과 맞닿아 있다.

중국 데이터센터 건설 업체들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현재 중국 전역에서는 400~500개의 데이터센터가 구축되고 있고, 1000억달러(약 144조원) 규모 정부 지원금이 분산 투입됐다. 정부 지원금을 받은 대다수 데이터센터는 이미 설치된 엔비디아 칩을 빼고 중국산 칩을 넣어야 하는 상황이다.

5일 중국 광둥성 광저우에 위치한 회사 본사에서 열린 엑스펑(XPENG) AI 데이 행사에서 허샤오펑 엑스펑 회장 겸 최고경영자(CEO)가 회사의 튜링(Turing) AI 칩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AP 연합뉴스

중국의 이번 조치는 예정된 수순이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앞서 지난 7월 미국 정부가 엔비디아 H20의 중국 수출을 재허가했지만, 오히려 중국 정부는 H20에 보안 우려가 있다며 사용하지 말라고 중국 기업에 권고했다. 여기에 더해 9월에는 바이트댄스와 알리바바 등에 엔비디아의 중국 수출 전용 칩 ‘RTX 프로6000D’의 주문과 테스트를 중단하라고 요구했다. 또 세관 당국까지 동원해 전국 주요 항구에서 엔비디아 칩의 수입을 차단했다. 미국의 견제에도 어렵사리 키워온 중국 AI 칩 제조 기술이 일정 궤도에 올랐다고 판단한 것으로 분석된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미국 규제에 속수무책이던 중국이 공세로 전환한 배경에는 자립 의지와 자신감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중국은 미국산 칩에 비해 전력 효율이 좋지 않은 자국 칩 사용을 독려하기 위해 전기료 지원 제도까지 내놨다. 자국 칩을 사용하는 데이터센터의 전기료를 최대 50% 감면해 주는 것이 골자다.

그래픽=김현국
앞서 2022년 미국 정부가 엔비디아의 A100, H100을 중국에 수출하지 못하도록 규제해 코너에 몰렸던 중국이 3년 만에 입지를 다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당시 엔비디아의 구형 모델까지 구할 수 없었던 중국은 AI 칩 자체 개발로 눈을 돌렸다. 반도체 산업에 3440억위안(약 70조원) 규모의 투자 펀드를 조성했고, 막대한 돈을 풀어 가능성 있는 업체들을 적극 지원했다. 초기 중국 AI 칩의 성능은 보잘것없었지만 꾸준히 투자한 결과, 엔비디아 대체를 목표하는 수준으로 성능을 끌어올렸다. 예컨대 작년 10월 화웨이는 엔비디아 H100의 60% 정도 성능을 내는 ‘어센드 910C’를 개발했다. 상대적으로 낮은 성능을 극복하기 위해 칩 384개를 묶어 엔비디아 최고 사양 시스템에 육박하는 효과를 구현했다. 가성비는 떨어지지만 물량 공세로 성능을 단시간에 끌어올린다는 전략이다.

중국 캠브리콘은 엔비디아 A100의 80% 성능을 내는 ‘MLU 590’을 개발하며 ‘중국의 엔비디아’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 업체의 AI 칩은 바이트댄스 등 중국 기업에 공급되고 있다. 중국 AI 칩의 약진과 대중 수출 규제로 엔비디아의 중국 점유율은 추락했다. 젠슨 황 엔비디아 CEO는 지난달 “중국 내 첨단 칩 시장 점유율이 2022년 95%에서 0%로 떨어졌다”고 했다.

그래픽=김현국

테크 업계 일각에서는 중국이 미국 의존을 완전히 벗어나겠다는 의지를 담아 ‘AI 칩 독립 선언’을 했더라도, 당장 미국 기술 수준을 100% 따라잡긴 어렵다고 본다. 앞서 모건스탠리는 작년 34%였던 중국 AI 칩 자급률이 2027년엔 82%까지 오를 것으로 예상했다. 다만 전문가들은 중국 당국의 이번 AI 칩 국산화 조치로 자급률 100% 시점이 기존 추정보다 대폭 앞당겨질 것으로 전망한다.

중국이 미국산 AI 칩 퇴출을 내세우며 사실상 선전포고를 하면서 반도체를 둘러싼 미·중 패권 갈등은 더 첨예해질 전망이다. 앞서 지난 2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엔비디아의 최신 사양 AI 칩은 앞으로도 중국에 허용할 수 없다고 밝힌 가운데, 중국의 이번 조치가 더욱 공격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의 AI 반도체 자립화가 눈앞으로 다가오는 상황에서 미국은 더 강한 견제에 나설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다. 이종환 상명대 시스템반도체공학과 교수는 “중국의 보복성 조치와 이를 더 억누르려는 미국의 패권 경쟁은 더욱 격해질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