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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디지털이노베이션 대상] 기고
장준연 KIST 부원장

1980년대 초, 자본도 기술도 인력도 열악했던 한국에서 반도체는 ‘과대망상’이자 ‘백전백패’로 치부됐다. 그때 고 이병철 회장은 결연히 말했다. “누가 뭐래도 우리는 반도체를 한다.”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한 그 결단은 D램 자립을 넘어 양산 경쟁력까지 끌어올렸고, 불과 몇 해 만에 우리는 세계 정상의 문을 두드렸다.

40여 년이 지난 지금, 반도체는 명실상부한 우리 경제의 심장이다. 지난해 우리나라 수출액의 약 21%가 반도체 제품이고, 올해에도 사상 최고 수출액을 경신할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메모리 반도체에서 한국의 존재감은 절대적이다. D램·낸드플래시에서 축적된 초미세 공정기술력, 압도적인 품질과 원가 경쟁력으로 세계 표준을 선도해 왔고, 위기 때마다 한국 경제를 떠받치는 굳건한 버팀목이 되어 줬다.

최근 챗GPT가 촉발한 AI 혁명이 반도체 시장을 뒤흔들고 있다. 시스템 반도체의 주력은 CPU에서 GPU, NPU로 이동했고 이에 대응하는 메모리 반도체 역시 고대역폭 메모리(HBM) 중심으로 판이 바뀌고 있다. SK하이닉스는 이 새로운 흐름을 선점하는 기술 혁신을 선보이며 AI 가속기용 HBM 시장의 최강자로 부상했다. 엔비디아의 주요 공급사로 자리 잡으며 점유율과 실적 모두에서 우위를 점했고, 2025년 HBM 시장 점유율이 60%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대만은 다른 전략으로 정상에 섰다. TSMC는 최첨단 공정의 속도와 수율을 동시에 끌어올리며, 2025년 2분기 기준 글로벌 파운드리 시장 점유율 70%를 상회하는 기염을 토했다.

현재 상황이 녹록지는 않지만 한국은 ‘남이 걸어보지 않은 길’을 스스로 개척해 온 저력이 있다. 일본이 지배하던 메모리 시장을 추격해 세계 1위에 오른 경험, 미세공정의 한계에 도전해 높은 수율을 달성한 집념의 DNA는 여전히 우리의 강력한 자산이다. 정부도 ‘기술 선도 성장’을 기치로 과감한 투자에 나서 그 성과가 ‘모두의 성장’으로 이어져 국민의 삶에 환류되도록 설계하고 있다. 이를 위해 국가 R&D 예산을 확대하고, 양자컴퓨팅·차세대 반도체 등 전략기술에 자원을 집중할 계획이다. 공공의 선제적 투자가 민간 투자 확대의 선순환으로 이어질 것으로 기대된다.

AI 혁명은 일시적인 유행이 아닌, 기존 질서를 뒤흔드는 거대한 변곡점이다. 챗GPT 이후 폭증한 글로벌 데이터센터에 대한 투자는 반도체 슈퍼사이클을 예측이 아닌 현실로 만들고 있다. 이제 승패는 단 하나, 누가 더 빨리 다음 세대의 표준을 선점하느냐에 달렸다. 메모리 초격차를 HBM 중심으로 공고히 하는 동시에 패키징·전력·열관리 같은 연계 기술을 함께 끌어올려 시스템 반도체와의 시너지를 극대화해야 한다. 해법은 0.001초를 다투는 자동차 경주 F1의 ‘원팀’ 플레이다. 각자의 역할에서 최상의 성능을 내며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공공은 원천기술과 인프라로 트랙을 깔고 민간은 그 위를 질주한다. 학계·연구소·기업이 한 몸이 되어 ‘빠른 학습과 즉시 실행’이라는 하나의 리듬으로 움직일 때, 한국은 과거의 K-반도체 신화를 뛰어넘어 새로운 혁신을 주도할 수 있을 것이다.

반도체산업 경쟁력의 핵심은 반복과 학습을 통한 끊임없는 진화에 있다. 미세한 편차를 집요하게 읽어내고, 설계·제조·패키징·소프트웨어를 ‘원팀’처럼 맞물리게 하는 나라가 결국 승리할 것이다. 우리에게는 이미 불모지에서 정상에 오른 경험이 있다. 이제는 흩어진 힘을 모아 폭발적인 속도를 낼 때다. 다시 거대한 슈퍼사이클의 파도가 밀려오는 지금, K-반도체의 힘을 세계에 증명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