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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 경북 안동 고운사 사찰림 산불 피해 지역에 작은키나무 싸리가 가득 자라고 있다. 김광우 기자.


[헤럴드경제=김광우 기자] “숲이 돌아오고 있다”

좀처럼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한 야산. 우거진 수풀 사이로 각종 벌레가 뛰어다니는 풍경이 포착됐다. 곳곳에는 배설물 등 야생동물의 흔적도 널려 있다.

언뜻 보면 전혀 특별하지 않은 모습. 하지만 반전이 있다. 이 숲은 불과 반년 전, 대형산불로 인해 ‘잿더미’가 됐던 곳이기 때문.

더 놀라운 것은 이게 모두 ‘자연의 힘’이라는 것. 실제 해당 산림은 산불 피해 이후 특별히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았다. 자연 스스로 다시 생태계를 복원한 결과인 셈.

2일 경북 안동 고운사 사찰림 산불 피해 지역에 새로운 나무가 자라고 있다. 김광우 기자.


물론 완전한 복구는 먼 이야기다. 여전히 까맣게 그을린 소나무들의 앙상한 가지가 먼저 눈에 띄는 상황.

일각에서는 불에 탄 나무들을 모두 베어내고, 새로운 나무를 심는 ‘인공 복원’을 주장한다. 임산물 생산 환경 조성 등 경제적 이유가 주요 논리로 거론된다.

하지만 자연 복원의 효과가 드러나며, 또 다른 산불 피해 예방을 위해서라도 ‘자연 복원’ 비중을 늘려야 한다는 주장에 힘이 실리고 있다.

실제 현장에서는 자연 스스로가 산불에 대비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을 조성해 나가고 있었다.

2일 경북 안동 고운사 사찰림 인근 산불 피해 지역. 김광우 기자.


지난 2일, 국제환경단체 그린피스와 함께 올해 봄 초대형 산불로 큰 피해를 입은 경북 의성군의 청년고찰 ‘고운사’를 찾았다. 그린피스 서울사무소는 현재 이규송 강릉원주대 생물학과 연구팀과 함께 ‘고운사 사찰림 자연복원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말 그대로 산불 피해 지역을 있는 그대로 놔두는 것. 고운사 자연복원 결정은 불교 종단이 사찰림 자연복원을 공식 선언한 첫 사례다. 아울러 나무줄기까지 피해를 입은 광범위한 산불 피해 지역에서 실시되는 최초의 자연복원 실험이다.

2일 경북 안동 고운사 건물이 전소돼 흔적만 남아 있다. 김광우 기자.


산불이 진화된 지 반년이 흘렀지만, 주변 풍경은 여전히 참혹했다. 고운사를 찾아가는 길, 인근 마을에는 불타버린 건물이 눈에 띄었다. 거주지를 잃어버린 다수 주민은 컨테이너로 만들어진 임시 주택에 머무르고 있었다.

생동감도 느끼기 힘들었다. 한때 가을철 ‘단풍길’로 유명했던 고운사 입구 쪽 나무들은 생명을 잃은 채 검게 그을려 있었다. 이른 아침이었지만 새 소리도 들리지 않고, 적막한 기운이 감돌았다. 국가 보물로 지정된 연수전 등 다수 건물도 전소된 채 흔적만 남아 있었다.

2일 경북 안동 고운사 사찰림 산불 피해 지역에 불타 죽은 나무가 남아 있다. 김광우 기자.


고운사의 풍경을 뒤로한 채 검은 소나무로 가득한 산에 올랐다. 이 교수는 “전부 죽은 나무”라고 설명했지만, 쉽사리 믿어지지 않았다. 잎이 떨어진 모습이, 다소 삭막한 겨울 산의 풍경과도 비슷하게 느껴졌다.

다만 그 생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나무에 몸을 스칠 때마다 적지 않은 양의 검은 재가 묻어났기 때문. 인근 산림 98%가 ‘잿더미’가 됐다는 얘기를 체감할 수 있었다.

2일 경북 안동 고운사 사찰림 나무에 손을 대자 검은 재가 묻어 나왔다. 김광우 기자.


하지만 조금 더 산을 오르자, 반전 풍경이 펼쳐졌다. 푸릇푸릇한 나무들이 빼곡히 바닥을 메우고 있었던 것. ‘풀’이라는 표현이 적절한 작은 이파리들도 있었지만, 1m 높이를 훌쩍 넘는 어엿한 ‘나무’들도 가득했다. 종류도 가지각색으로, 나름의 생명력을 뽐내고 있었다.

이 교수는 “산불 이전에 토양 속에 있던 종자가 죽지 않고 발화한 경우도 있고 새롭게 씨에서 자라난 나무들도 다수 발견되고 있다”며 “일부 지역에서는 고사리 등 영양가 높은 풀 종류도 많이 자라나면서, 자연 복원이 이뤄지고 있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2일 경북 안동 고운사 사찰림 산불 피해지역에서 이규송 강릉원주대 생물학과 연구팀이 식생조사를 하고 있다. 김광우 기자.


이날 이 교수는 가로세로 10m 크기로 구역을 나눠 식생 조사에 돌입했다. 구역을 표본으로 지정하고, 향후 식생의 자연 회복 과정을 관찰하기 위해서다. 향후 주기적인 관찰을 더 해, 내년 봄에 또 다른 연구 결과가 발표될 예정이다.

이 교수는 “현재는 사찰림 구역에서 자연 복원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시간이 흐를수록 다른 사유지 등과 차이를 보일 것”이라며 “사찰림과 밀접해 있는 사유지에서 벌목과 인공조림을 진행한다고 하면, 서서히 자연복원과 차이를 나타내며 직관적으로 확인할 기회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2일 경북 안동 고운사 사찰림 산불 피해지역에서 멧돼지가 진흙 목욕을 한 흔적이 발견됐다. 김광우 기자.


사찰림에서는 새로운 나무의 성장과 함께 다양한 동·식물 생태계 회복 현장이 포착됐다. 산 곳곳에서는 멧돼지, 고라니 등 포유류의 배설물과 발자국이 발견됐다. 다른 날 진행된 현장 조사에서도 너구리와 박쥐, 등줄쥐 등 다수 동물이 서식하고 있는 것이 확인됐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소실된 침엽수 사이로 굴참나무 등 활엽수 성장이 활발했다는 것. 통상 침엽수는 산불 피해가 큰 종으로 알려져 있다. 불이 나무껍질을 타고 꼭대기까지 옮겨붙는 현상에 취약하기 때문. 소나무 단순림 위주로 구성된 인공조림이 초대형 산불 확산에 기여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2일 경북 안동 고운사 사찰림 산불 피해에서 살아남은 나무들. 김광우 기자.


실제 고운사 사찰림에서 살아남은 나무 대부분은 참나무류였다. 참나무가 밀집된 공간은 마치 산불이 지나가지 않은 것과 같은 생명력을 뽐내고 있었다. 향후 자연스럽게 복원 과정을 지켜볼 경우, 참나무류가 경쟁력을 가지고 숲을 지배하게 된다는 게 그린피스 측의 설명이다.

산림 내 생명체들은 생존을 위해 포식, 기생, 공생과 같은 관계를 맺으며 치열하게 경쟁한다. 시간이 지나면 생물들은 균형을 이루며, 환경적 조건에 최적화된 생태계를 구성한다. 우리나라 대부분 지역에서는 참나무류가 경쟁력을 가지고 숲을 지배하게 된다.

2일 경북 안동 고운사 사찰림 산불 피해 지역에서 나무가 자라고 있다. 김광우 기자.


이러한 과정을 통해 숲은 안정된 상태, 극상림(ClimaxForest)에 도달한다. 극상림에서는 특정 지역의 지형과 환경 조건에 적합한 수종들이 자연스레 어우러진다. 이에 인간의 계획적 조림으로는 재현하기 어려운 천연 ‘방화림’의 구조를 지니게 된다.

문제는 다수 산불 피해 지역에서 이같은 ‘자연복원’을 기대하기는 힘든 상황이라는 것. 임산물 생산 등 지역 경제 차원에서 침엽수 인공조림을 원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심지어 산불 피해 구제를 명목으로, 산림 보호지역을 파괴하거나 난개발할 우려가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2일 경북 안동 고운사 사찰림 산불 피해 지역에서 죽은 나무들 사이로 새로운 나무가 자라고 있다. 김광우 기자.


국회는 지난 9월 본회의에서 산불 피해 구제를 목적으로 한 ‘산불특별법’을 통과시켰다. 그런데 여기에는 산림청장의 권한이던 ‘보전산지 변경·해제’나 ‘자연휴양림 지정·해체’ 권한을 시도지사에게 위임(제32조)해, 시도지사의 판단으로 골프장 같은 임의 개발이 가능케 하는 등 각종 개발 지원 조항이 포함됐다.

최태영 그린피스 생물다양성 캠페이너는 “이번 결정으로 한국 정부의 ‘2030년까지 보호지역 30%를 지정하겠다’는 국제 사회와의 약속이 흔들릴까 우려된다”며 “법안을 만든 산불특위와 여야 국회는 공동의 책임을 지고 독소조항 삭제와 개정 작업에 즉각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