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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실리코, AI 신약 임상 2상 첫 성공
물질 발굴부터 생산까지 8년→46일
국내 기업 AI 활용 여전히 초기 단계
"전문인력 부족... 협력 생태계 필요"
경기 과천시 JW중외제약에서 한 연구원이 인공지능(AI) 기반 신약 개발 통합 플랫폼 ‘제이웨이브’를 시연하고 있다. JW중외제약 제공

인공지능(AI) 기반 글로벌 바이오기업 '인실리코 메디슨'은 최근 특발성 폐섬유화증 치료 후보물질 '렌토서팁'을 사람에게 임상시험하는 데 성공했다. AI가 질병 원인 물질(타깃) 발굴, 후보물질 설계, 임상시험까지 주도해 개발한 약물이 임상 2상 단계에서 효과와 안전성을 입증한 세계 최초의 사례다. 핵심은 획기적으로 짧아진 개발 기간이다. 타깃 발굴부터 후보물질 설계, 선도물질 선별·합성·생산까지 46일이 걸렸다. AI를 안 쓴다면 통상 8년이 소요되는 과정이다.

또 다른 AI 신약 개발 기업 '리커전 파마슈티컬스'는 일주일에 200만 건 이상 세포실험을 하고 있다. ①대량의 데이터를 축적·생산한 뒤 ②이를 AI 모델에 학습시키고 ③AI가 도출한 가설을 검증하는 과정을 자동화했다. 여기엔 엔비디아의 초고속 AI 슈퍼컴퓨터가 이용됐다. 이 기업은 2023년 엔비디아에서 5,000만 달러(약 726억 원)를 투자받았다.

"전문가도 생각 못한 약물 구조까지 제시"



AI가 신약 개발의 '게임 체인저'라고 불리는 이유는 이처럼 개발 기간을 줄이고 과정을 자동화는 것은 물론, 사람이라면 알기 어려운 내용까지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표준희 한국제약바이오협회 AI신약연구원장은 "AI는 데이터와 경험을 학습해 신약 개발 전 과정을 자동화하고 최적화할 수 있다"며 "연구자가 놓칠 수 있는 패턴을 찾아내고, 기존에 생각하지 못했던 약물 구조까지 제시하면서 시간을 단축하고 성공률을 높인다"고 설명했다. 정은경 보건복지부 장관이 "AI 기술로의 신속한 대전환을 위해 AI 신약 개발 전주기를 지원하겠다"고 밝힐 만큼 정부도 관심이 많다.

그래픽=신동준 기자

최근 국내 기업들도 AI 활용에 적극 나서고 있다. 한미약품은 지난달 말 미국 식품의약국(FDA)에 '근육이 증가하는 비만 신약' 임상 1상 진입을 신청했는데, 이 약물을 AI를 이용해 개발했다. 과제 시작부터 1상 진입 신청까지 평소의 절반가량인 30개월이 걸렸다고 한다. JW중외제약은 신약 후보물질 발굴에 AI를 활용하고 있고, 대웅제약은 주요 화합물 8억 종을 데이터베이스화해 암세포 억제 선도물질 확보 기간을 단축했다.

"신약·AI·로봇 다 잘하는 인재 어디 없나요"



다만 현재로선 글로벌 기업과 격차가 크다.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은 보고서에서 "국내 제약·바이오 업계의 AI 도입을 통한 구체적
성과는 영세한 규모로 추진되거나, 도전하는 초기 단계"라고 진단했다. 한 제약업계 관계자는 "AI로 결과를 예측해보곤 하지만, 결국 직접 실험실에서 해본 뒤에 'AI가 맞았다'고 확인하곤 한다"며 "AI는 여전히 보조 수단"이라고 말했다.

근본적인 원인은 자원의 차이다. 리커전과 같이 엔비디아의 통 큰 투자를 기대하기 어려운 것은 어쩔 수 없다 해도 데이터 인프라와 컴퓨팅 자원, 자본력의 차이가 심하다. 인적 자원도 마찬가지다. 한 국내 제약사 관계자는 "신약 개발과 AI·로봇공학을 동시에 이해하고 연구할 수 있는 전문 인력이 부족하다"며 "산업계에도 이런 융합 인재를 활용할 수 있는 체계가 미흡하다"고 진단했다.

글로벌 빅파마를 중심으로 파트너십이 구축되는 해외와 달리, 각 기업·연구소·정부가 분절적으로 기능하는 점도 문제로 꼽힌다. 표준희 원장은 "글로벌 빅파마는 규모가 워낙 크기 때문에 여러 바이오 벤처기업, 테크기업과 협업하고 데이터 인프라를 구축하는 등 자체적으로 하나의 생태계를 만들 수 있다"며 "그럴 수 없는 국내에선 제약기업, AI 기업, 대학, 연구소가 네트워킹을 통해 협력할 수 있는 생태계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