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부 정보기술(IT) 인프라 핵심인 국가정보자원관리원(국정자원) 대전본원 화재가 발생한 지 한 달이 됐다. 9월 26일 발생한 화재로 멈췄던 700여개 시스템 가운데 70% 가량만이 복구됐다. 정부는 다음달까지 최종 복구를 목표로 하지만 100% 완전 복구는 어렵다는게 전문가들 분석이다. 디지털정부 세계 1위 타이틀이 무색해졌다. 허울뿐인 성적이었다는 민낯을 여실히 드러냈다.
위기에 매몰되지 말고 이번 기회에 공공 IT 인프라를 전면 개편해야 한다는게 전문가들 공통된 제언이다. 노무현 정권 시절 닻을 올렸던 전자정부 틀을 대대적으로 개편하고 인공지능(AI) 시대를 대비한 인프라 정비가 이뤄져야 한다는 지적이다. 단순 인프라 문제에 그치지 않고 우리나라 디지털 정부가 실질적 세계 톱 반열에 오르기 위한 거버넌스 재정립 등 새판짜기가 필요하다.
◇디지털정부, 인프라부터 앱까지 전면 개편해야
전문가들은 이번 기회에 공공 디지털인프라 전면을 원점에서 개편하는 계기로 삼아야 함을 이구동성 강조한다.
20년 전 국정자원(옛 통합전산센터) 설립 당시, 부처마다 흩어진 정보자원을 한 곳에 모아 관리하자는 하드웨어 관점은 이제 한계에 부딪혔다. 2010년대 클라우드 기술이 등장하면서 클라우드 기반으로 인프라를 전면 개편해야 한다는 지적이 이어졌지만 '무늬만 클라우드' 인 채로 10년의 세월이 또 흘렀다.
이번 개편 핵심은 디지털정부 인프라부터 애플리케이션(앱)까지 전반을 아우르는 로드맵 마련이다.
국정자원 화재 후 많은 이들이 대책으로 언급한 민간 클라우드 도입은 하나의 수단이지 최종 목적지는 아니라는 게 전문가들 지적이다.
송상효 정보자원통합심의위원회 위원장(숭실대 교수)는 “전자정부를 넘어 AI 기반 디지털정부로 한 단계 도약하기 위해서는 인프라만 바꾼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앱까지 전면 전환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예산은 현실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이 때문에 시스템별 구체적 실행계획 수립이 필수다.
정부는 이미 2년 전 정부 전산망 장애 사태 후 공공 시스템을 1~4등급으로 나눴다. 소방·전기·통신 등 공공 데이터센터가 갖춰야 할 안정성 기준을 마련해 시스템 점검도 마쳤다. 이를 토대로 레거시·클라우드 네이티브·애플리케이션(앱) 현대화 등 시스템별 로드맵을 마련해야 한다.
로드맵 마련과 함께 AI 시대 맞는 공공 인프라를 위한 표준프레임워크 재정립과 인프라부터 앱까지 현황을 한 눈에 살피는 옵저버빌리티도 필요하다.
송 위원장은 “전자정부 프레임워크 덕분에 전자정부 시스템이 안정적으로 구축됐지만 전통적 차세대 방식인 모놀리틱(빅뱅) 등에 맞춰져 근본적 변화가 필요하다”며 “디지털정부 프레임워크부터 클라우드 네이티브와 앱 현대화, AI 시대에 맞게 재설계 돼야한다”고 말했다.
이어 “AI 시대 시스템 복잡성이 높아지면서 레거시·클라우드 등을 통합 관제하고 AI 기반으로 문제를 예측, 상황 발생 시 신속 대처하도록 하는 '옵저버빌리티'가 필수인 시대”라면서 “AI 기반 관제 등 옵저버빌리티 확보도 함께 이뤄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내외부 통한 IT 전문성 강화는 필수
2년 전 행정망 마비 사태뿐만 아니라 이번 국정자원 화재에서도 공공 내 전문가 부재의 문제가 여실히 드러났다. 국정자원을 비롯해 국가 정보화를 담당하는 IT 요직과 실무는 보직순환이 아닌 실무 전문가가 맡는 구조가 정립돼야 한다.
한 전직 행안부 고위 공무원은 “과거 정부 시스템 일부는 행안부 GCC(Government Computer Center)에서 직접 개발했다”며 “2000년대 이후 모든 공공 사업을 민간에 맡김으로써 공무원이 현장 실무를 알기 어렵고 장애 등 위기상황시 대응력도 악화됐다”고 지적했다.
이어 “주요직은 공직 순환보직이 아니라 실무를 아는 전문가가 맡도록 하고, 정부 내 정보화 인력 역시 민간 실무 경력자를 과감하게 정례 채용해야 한다”며 “시스템 개발 외 정보화 기획 등 업무범위를 확대해 공무원의 역량을 강화하는 노력이 동시 이뤄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내부 전문 역량이 부족하다면 협력은 필수다. 전문가들은 이번 공공 인프라 대책 시행 시 민간과 적극 협력하는 동시에 거브테크 시장을 육성하는 계기로 삼아야한다고 제언한다. 내부 부족한 전문성을 확보하는 동시에 민간 투자와 적절한 협력으로 예산 문제까지 동시 해결 가능하기 때문이다.
김숙경 카이스트 교수는 “그동안 정부는 민간을 단순한 기술 공급자, 아웃소싱 담당자 정도로만 여겼다”면서 “공공이 민간 기술력을 존중하고 함께 발전방향을 고민해야 빠른 속도로 변하는 기술환경에 대응한 시스템과 대민서비스를 혁신적으로 제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이 과정에서 신기술 기반 경쟁력 있는 거브테크 기업과 생태계도 함께 만들어 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민관협력이 이뤄진다면 현재 단일 집중형으로 인한 문제도 해결 가능하다. 이는 이미 행안부와 국정자원도 인지하고 있었다. 화재 발생 전인 지난달 초 '디지털정부 인프라 혁신 전략'을 마련, 민간 클라우드·AI 인프라를 전격 도입·활용하면서 정부 시스템 분산·전문화를 통해 안정성도 강화하고 AI 시대까지 대비하려 했었다.
◇공공 정보화, 범정부 거버넌스 확립해야
거버넌스는 반드시 풀어야 할 숙제다.
공공부문발주자협의회 초대 회장이자 해양수산부·국토부 등 주요 부처 공공 정보화를 총괄했던 강재화 한국상용SW협회 부회장은 “거버넌스 부재가 이번 사태 근본 원인 중 하나”라며 “국가 정보화 컨트롤 타워가 있어야 방향을 제시하고 여러 부처 간 얽힌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고 말했다.
국가 주요 IT 시스템을 다루는 국정자원은 사실상 방치된 곳과 다름 없었다는 것이 다수 전직 공무원의 공통된 증언이다. 특히 2014년 책임운영기관으로 지정되면서 행안부 본부 감독에서 벗어났다.
또 다른 전직 행안부 공무원은 “이번 화재처럼 문제 발생 시 그 책임을 공무원 2급에 속하는 원장에게 모두 지도록 하는 조치로서, 행안부조차 디지털정부 컨트롤타워 역할을 포기한 것”이라면서 “대통령이 중심이 돼 강력한 거버넌스 체계를 만들어야 만 범정부 거버넌스 체계가 마련될 것”이라고 말했다.
공공 디지털인프라 전반을 책임질 별도 기구 혹은 거버넌스 총괄 조직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제시된다.
김숙경 교수는 “영국은 '거버먼트 디지털 서비스(GDS)'라는 기술 전담 조직을 만들어 500여명에 달하는 전문 인력이 디지털정부 인프라를 전면 지원한다”며 “싱가포르 역시 전담 부처를 통해 디지털정부 중장기 방향을 설정하고 걸림돌을 찾아 개선하는 등 우리나라 역시 기술 전략·실행을 이끌어갈 조직이나 컨트롤 타워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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